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메로베우스 왕조 (문단 편집) === 정부 작동 원리 === 메로빙거 왕조 시절 프랑크 왕국의 정부 체제는 기본적으로 게르만 전통에 기반해 있었으나, 동시에 매우 로마적이기도 했다. 서로마 멸망 이후 나타난 게르만 왕국들이 다 그렇듯 메로빙거 국왕들은 정복을 행하고 새로 정복한 땅과 전리품을 게르만족의 가신 제도에 따라 자기 가신들에게 분배했으며, 이들은 그 땅에 정착해 유력자가 된다. 이때부터 이미 농노제의 원초적인 형태가 나타나는데, 고대 로마 후기부터 발생한 콜로누스라고 불리는 토지에 묶인 농민들 또한 토지와 함께 수여되었으며, 이들은 토지가 상속되면 그에 따라 같이 상속되었다. 왕들은 로마의 전통에 따라 자기 측근 또는 믿을 수 있는 지방 유력자들을 코메스, 즉 백작으로 임명했다. 이때는 봉건제가 정립되기 전이기에 백작은 공식적으로 세습되는 작위는 아니었는데, 후기로 갈수록 메로빙거 왕조의 힘이 약해지고 지방이 따로 놀기 시작하면서 세습되는 현상도 나타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카롤루스 마르텔이 부상하는 메로빙거 왕조 말기부터 아키텐 공작위가 세습되는 반독립적인 작위로 바뀌었다가 샤를마뉴 대제때에야 축출된 것이다. 이런식의 행정체계는 프랑크 왕국의 땅이 넓어짐에 따라 지방 각지에 이식되었으며, 로마 제국의 체제가 온전히 살아남은 프랑스 남부에서도 원활하게 작동했다. 메로빙거 군주들은 최대한 지방 세력의 발호를 억제하고 군주권을 강화하고자 지방 행정관들이 토호 세력과 유착하는 것을 막고자 했으며, 또 다수의 피지배층이었던 로만-갈리아인들을 관료조직으로 끌어들였다. 이러한 시도는 어느정도 성공적이었는지 다고베르트 1세 시기가 되면 프랑크 왕국 전국의 관료체제가 완전히 로마인들로 채워져 '로마화'되기에 이르렀으며, 모든 공식문서는 라틴어로 작성되었다. 한편 클로타르 2세의 시기부터는 성직자들이 주요한 관료 역할을 맞게 되는데, 이는 성직자가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맡았던 것과 관련이 있다. 한편 지방 행정관인 백작들은 자기가 다스리는 자유민들을 군대로 징집하고 왕에게 군을 필요할 때 제공해야 했으나, 그 대가로 그들에게 땅을 나눠줘야했다. 이것은 로마의 은대지 제도의 유산인데, 메로빙거 왕조 멸망 이후 가신 제도와 결합해 봉건제가 탄생한다. 어쨋든 이런 백작들과 자체적인 무장을 갖춘 자유민들로 구성된 왕국 회의가 정기적으로 열렸는데, 이 회의에서는 전쟁을 벌일지에 관한 논의를 비롯해 여러 정교한 군사적, 전술적 논지들이 오갔다. 일반적인 편견과는 달리 이 회의에 참석하는 귀족들을 비롯한 전사 계급은 정교한 전술적, 전략적인 명령을 이해하고 수행할 수 있었고, 문맹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카페 왕조의 성립부터 극명하게 나타나게 될 왕의 사유지 전통, 즉 왕이 자기가 보유한 사유지에서 나는 재산만으로 자기와 자기 가족들을 부양하는 전통이 이 시기부터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메로빙거 왕조 시대의 프랑크 왕국은 로마의 유산을 받아들여 어느정도 안정적으로 중앙집권화를 이루는 데 성공했으나, 그 근본은 지방분권적이었던 것이다. 이런 면모는 메로빙거 왕조 내의 내분과 분할이 격화되고 왕이 힘을 잃으면서 가속화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